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파엘로 산치오 (문단 편집) === 피렌체 시기 === 1504년 10월 조반나 펠트리아가 [[피렌체]] 공화국의 장관 피에르 소데리니[* 보통 장관이 아닌 종신 장관으로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소데리니가 완성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을 보고 코가 크다고 하여 미켈란젤로가 돌가루를 뿌리며 손질하는 시늉을 하자 이제 괜찮아보인다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에게 보낸 편지가 전한다. '대단히 뛰어난 재능을 지닌, 우르비노의 화가 라파엘로가 피렌체에서 공부를 하기 위해 얼마간 머물기로 결심했습니다.... 가능한 한 친절하게...' 피렌체에서 작품 제작 기회를 제공해줄 것을 부탁하는 내용이다. 소데리니는 당시 도시의 명성과 위신을 높일 예술작품의 창작을 북돋는 노력을 하고 있었고,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가 1504년 팔라초 베키오의 거대한 홀에 프레스코화를 그리게 되었다. 레오나르도는 '앙기아리 전투', 미켈란젤로는 '카시나 전투'의 그림을 의뢰받았다. 둘은 모두 그림을 완성시키지 못했으나 여러 예술가들이 습작한 그림들이 남아있으며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친다. 당시 고향을 갓 벗어난 23세의 라파엘로 또한 그 현장을 목격했을 것이다. 당시 라파엘로는 피렌체에서는 재능을 닦는 수많은 젊은 예술가 중 한 명이었으며 한동안 이름이 이미 알려진 우르비노와 페루자에서 의뢰 받은 작품의 제작에 몰두한다.[* 소데리니 또한 조반나의 추천을 받은 라파엘로에게 레오나르도나 미켈란젤로 같이 큰 프로젝트의 의뢰는 하지 않았다.--아직 너무 어려 당시 명성이 그들만 못한 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레오나르도의 스튜디오에 방문해서 모나리자를 보고 남긴 스케치도 전하고 있다. 서서히 이름을 알린 라파엘로는 피렌체에서도 봉헌화와 초상화, 종교화의 의뢰를 받아 제작했고 부유한 부르주아들의 인정을 받기 시작한다. 타데오 타데이[* Taddeo Taddei, 1470-1529, 상인이자 예술 후원가로 당시 인문주의자, 작가, 예술가와 친하게 지냈다.]는 라파엘로를 저녁 만찬에 자주 초대했고, 라파엘로는 그의 친절에 보답하기 위해 2점의 그림을 선물하였다.[* 조르조 바사리, '예술가열전'] 그 그림 중 하나가 ''''테라누오바 성모''''이다. 비슷한 시기에 ''''대공의 성모''''도 완성한다. 1506년에는 ''''벨베데레 성모''''를 그렸다. 이 성모 그림들 외에도 ''''검은 방울새의 성모'''', '큰 쿠퍼 성모', '에스테라지 성모' 등의 성모 그림들이 모두 이 시기의 작품이다. 비슷한 시기에 그를 돌봐준 친한 숙모 시모네 차를라에게 주기 위해 맨 위의 프로필에 있는 자화상을 완성한다. 그리고 당대의 유명한 보석상 아뇰로 도니의 의뢰로 '''도니 부부의 초상'''을 그려주었다.[* 특히 아내의 초상은 모나리자의 구성과 비슷하다.][* 미켈란젤로가 1503년에 그린 '도니 톤도' 또한 아뇰로 도니의 의뢰로 둘의 결혼 기념으로 그려진 것이다.] 그리고 1507년 피렌체에 머문 막바지에 피렌체의 상인 도메니코 카니자니의 의뢰를 받아 ''''카니자니 성가족''''을 그렸다. 24세의 라파엘로는 이 작품으로 다른 대가들의 기법을 완전히 숙달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인물 사이의 애정과 친밀함을 더욱 돋보이게 연출해내는 경지에 도달했다. 또한 페루자의 발리오니 가문의 의뢰로 심혈을 기울인 작품 ''''발리오니 제단화(보르게세 매장)''''를 완성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